어글리슈즈 열풍의 주역 명품 발렌시아가에 대해 소개한다.
-재단의 마법사라 불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1895년 스페인의 한 어촌에서 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그의 아버지는 일찍 사망하고 재봉사였던 어머니 영향에 그도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옷을 만드는데 선천적인 재능으로 인해 13세가 되던 해
마드리드 <카사 토레스>후작의 부인이 입던 드레스를 빌려가 며칠 후 부인에게 똑같은 옷을 만들어 보였다.
후작의 부인은 프랑스 장인이 만든 오트 쿠튀르(고급 의상실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옷 보다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여
산 세바스찬에 있는 부티크에 추천되어 스페인에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된다.
1919년에는 24살이라는 어린나이로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한다.
하지만 1937년 스페인에서 내란으로 인해 모든 매장의 문을 닫고 패션의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로 무대를 옮긴다.
당시 그곳은 샤넬, 디올, 루이비통 등의 디자이너들이 있었지만
그만의 구상, 재단 테크닉등으로인해 파리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다.
위 <오트 쿠튀르>에 대해 추가로 설명하자면
디자이너와 재봉사는 별개의 직업이다.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에는 아예 재봉이나 패턴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기본적인 것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술자에 비하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렌시아가는 디자인은 물론 재봉까지 능했다.
이에 샤넬이 그야말로 진정한 쿠튀리에(재봉사)라 불렀다.
시대가 변하며 <오트 쿠튀르>보다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패션이 중심에 서게 되면서
쿠튀리에로서의 자존심을 지닌 발렌시아가는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1972년 사망하게 된다.
-현재의 발렌시아가-
발렌시아가 오랜 기간 명성을 잃은 이후 니콜라스 케스키에르가 1996년 26세의 나이로 발렌시아가를 일으킨다.
발렌시아가 사망 이후 오랜만에 프랑스는 니콜라스 케스키에르라는 스타 디자이너를 배출한다.
그는 '모터백'이라고 불리는 가방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2013년 발렌시아가를 떠나
LVMH 산하인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다.
케스키에르 이후 알렉산더 왕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16/SS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얼마 되지 않아 우려먹고, 재미없고 상업적인 디자인으로 인해
더 이상 발렌시아가의 쇼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악평과 발렌시아가에서 짤리게 된다.
알렉산더 왕 해고 이후 차세대 디자이너는 게스키에르와 같이 잠재력 있는 디자이너로 데려와
데뷔시켰으면 좋겠다는 것이 브랜드의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2015년 11월 드디어 발렌시아가를 이을 디자이너가 임명된다.
바로 브랜드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다(Demna Gvasalia)
그는 베트멍의 힙함과 발렌시아가의 그동안의 이미지를 융합하여 현재 패션 트렌드를 강타했다.
요새도 자주 보이는 스피드러너, 트리플S 모두 그의 작품이다.
2017S/S에는 스피드러너로 성공을 거둔 얼마 뒤 2017F/W에 바로 트리플S를 선보였다.
어글리슈즈의 시초는 2013년 아디다스X라프 시몬스 오즈위고였으나 반응은 미비하였다.
그러나 트리플S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현재도 어글리 슈즈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20S/S쇼에서 그는 프레타 포르테(기성복)가 아닌 오뜨쿠튀르로 돌아간다고 발표하였다.
오뜨쿠튀르 데뷔는 20F/W로 모두가 그의 컬렉션을 기대하고 있다.
수정사항이나 발렌시아가에 대한 의견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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